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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캐롤 질리언 "다른 목소리로" 독서 후기-숨겨져 있던 나로의 두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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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의 순간

캐롤 질리언은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너의 모습은 어떠니?’

특정 구절을 읽고 문득문득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왜 나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판단하고 행동해왔는가?’에 대한 자각이자 충격의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23년을 살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갖는 피해 의식은 거의 없었다고 회상된다. 하지만 분명 “여자라 별 수 없어”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의식적으로 행동했던 적은 많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자라서 별 수 없다”는 말이 내포하는 의미가 무엇이고, 나는 왜 그러한 평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는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여자라서 별 수 없다”는 말은 여자로서의 특징과, 그것을 평가하는 태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자이기 때문에 남에게 의존적이고, 수동적이고, 받는 데 익숙한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러한 특성을 열등한 것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녹아있는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 말을 듣기 싫어서 이러한 성향들을 숨기고자 했는가? 내가 의존적이거나 수동적으로 행동한다면 남들은 나의 그러한 성향과 내 존재 자체를 열등하다고 판단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의 사고와 행동 과정에서 ‘나’가 주체인 것이 아니라 그러한 특질을 하찮게 여기는 ‘시각’(이것은 하나만을 1위로 상정하는 남성적 시각인 동시에, 남성적인 것을 우월한 것으로 보는 남성적 시각)이 주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나 역시 지금까지 ‘다른 목소리로’ 살아온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삶이 무언가에 의해 조정당하고 있다는 위협까지 느꼈다.

나는 그동안 ‘대한민국의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밝혀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였다. 하지만 「다른 목소리로」와 만난 지금, 여성으로서의 삶의 본질에 대해 반드시 한 번쯤은 짚어 보아야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러한 과정은 나, 권주희 라는 한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단서를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내 모습의 실체

나는 나를 잘 포장한다. 이 책에 제시된 여성스러운 특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지만, 때에 따라 그러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노력한다. 타인을 잘 보살피려 하며 그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단력 있고, 견고한 모습으로 일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나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그 성공의 필요조건은 카리스마와 강인함이다. 이러한 모습은 여성에게 기대되는 ‘여성스러움’과는 상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공을 위해서는 이러한 변장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왔다.

고전 소설 속의 여성 영웅들도 대부분 남성이나 다른 형태의 물건으로 변장하여 업적을 이룬다. 대부분의 경우 여성의 몸으로는 대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작품들의 그러한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 시대적인 상황과 여성에 대한 인식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받아들였을 뿐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영웅’이라는 말의 정의 자체가 나의 인식 속에 ‘남성적인 것’이라고 뿌리 깊게 자리 잡혀 있는 사실을 깨닫자 다시 한 번, 왜 그래야만 하는지 심란해졌다. 아무런 의심 없이 인식하고 있는 명사들의 뜻이 대부분 남성적인 것, 혹은 중심적이라고 여겨지는 단 한 가지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면 간단하겠지만, 그러한 태도의 반복은 결국 나 자신의 목소리가 쉽게 묵살당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것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까지 나의 행동의 판단 기준이 되었던 진리, 정의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그것의 실체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일 것이다.

나의 목소리

진실로 내가 원하는 바에 의해서 무언가를 결정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가? 딸로서 부모님의 바람대로, 여성으로서 사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선택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내 자신의 목소리’에는 얼마나 귀를 기울였는가? 나는 불필요하게 희생 받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무의식적으로 희생에 길들여져서 그것이 희생인지 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은 아닌가?

무언가를 결정할 때 ‘내가 행복할까?’라는 기준에 맞추어 판단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러한 태도는 이기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내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 같은 행동은 쉽게 하지 못해왔던 것 같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라는 것은 어쩌면 다수의 여성들에게 내재화된 성향일지도 모른다. 주변의 친구들을 살펴봐도 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해지는 엄격한 통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문제 상황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본능, 타인에 대한 배려의 발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하지 못하고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직시하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무감각한 상태로의 전락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기

나 자신에게 솔직하여 내린 판단으로 행한 행동은 목적을 갖게 되고, 그것은 행위에 대한 책임과 확신을 갖게 한다고 질리언은 말한다. 나의 목소리를 타인에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판단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고, 그러한 확신은 자기 자신을 먼저 설득시키는 데에서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설득할 내용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고, 이러한 확신은 내면과의 솔직한 대화를 통해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혼전 순결

‘임신 중절 결정 연구’를 나의 가치관과 연결시켜 생각해보니,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순결’에 대한 나의 의식의 문제이다. 20년대 신여성들의 정조관념과 그들의 실상을 접하며,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나에게는 적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녀들은 여성의 육체적인 순결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동안 나는 남녀가 성관계 후 임신 등의 문제가 생겼을 때. 직접적인 피해자는 여성이므로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 여성 자신이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결혼 전에는 육체적인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사실 여성문학론 강의를 수강한 후 이러한 내 입장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고, 순결에 관한 입장을 재정립해야 함을 깨닫고 있었지만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임신 중절 연구 대상자들의 면접내용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혼전 순결을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육체적으로나 사회인식 면에서 여성이 피해자가 되므로’인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성욕 때문에 성관계를 선택했을 때 뒤따르는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요소가 어느 정도 작용하는 듯이 보였다. 즉 성관계에 대해 금욕을 주장한 이유가 진정으로 그것이 더 옳다고 확신해서가 아니라, 문제 상황에 대한 회피를 위한 막연한 신념이며 진실된 내면의 소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끊임없는 해체의 과정 : 절대적 진리는 없다.

페미니즘적 시각은 새롭고 다양한 목소리의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갖는다. 여성문학론 수업을 듣는 이유도 이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 강의를 듣기 시작한 후와 전, 「다른 목소리로」를 읽은 후와 전의 내 모습은 확실히 변화했다. 내가 자각하지 못했던 행동, 의식 등에 대해 고찰할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지닌 여성성의 가치를 재평가해보았으며, 무엇보다도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겠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솔직한 태도는 어떤 시련과 맞닥뜨려도 그것을 성장의 기회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이 책과 페미니즘 이론 자체는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비추어보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이 책을 통해 전달받은 메시지에 크게 동요되어, 여러 가지 상황을 왜곡되게 해석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독서 후의 소감을 남자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부정적인 어조로 “페미니스트 같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또 다른 맥락에서의 나 자신과 새로운 사유체계를 발견하게 된 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 나의 성장과정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페미니스트나 페미니즘적인 성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여성지식인으로서 무언가 사회적 모순을 발견해야한다는 의무감을 가졌던 내 모습이, 감정적으로 느꼈던‘막연한’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무지와 나를 둘러싼 환경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해버린 태도가 결합된 결과일 것이다. 나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대해 항상 깨어있는 민감한 삶의 태도의 필요성과, 세상에는 판단의 기준과 현상의 발생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함을 깨닫게 해준 독서 체험이었다.

하지만 내가 접하게 된 내용은 서양 여성의 목소리로 논의된 사항들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들의 목소리로부터 분리된, 진정한 나의 목소리를 탐색해봐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겠다.

- 2007년 작성한 국문과 여성문학 강의 리포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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