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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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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아트센터,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2010년 12월 26일 공연
학부 때 소설로 읽은 후 5~6년 만에 다시 무대에서 접하게 된 구보씨는 어쩐지 좀더 가까이 다가왔다. 한 학기 성적 또는 연애문제가 고민이었던 20대 초반 풋풋한 문학소녀가 만난 구보씨의 모습은,  "당대 지식인의 방황과 고뇌, 또 문인으로서의 섬세한 관찰력" 정도였다면 '생활을 갖게 된' 직장인으로서 만난 구보씨는 좀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물이 되어있었다.

구보씨의 일일은 극에 등장하는 절친한 형 김기림 시인의 말처럼 지리멸렬한 인간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치만 어찌 생각하면 그게 현대인의 모습이고, 또 내 주변 많은 직장인의 모습, 또 내 모습이다.
구보씨는 자신에게 조금의 자본과 시간만 있다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아니,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더라도 경성역에 작은 여행가방을 하나 들고 나가는 그 기분만이라도 느껴보고 싶어한다. 지금 여기가 아닌 새로운 어딘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구보는 갖고 있다. 구보는 직장을 갖지 않은 소위 "생활이 없는 자"이지만 그도 떠남을 꿈꾸고, 또 수많은 "생활을 가진 자"들도 떠남을 꿈꾼다. 그치만 그 떠남이 구보 또는 생활자들이 가진 근본적인 고독과 고뇌와 피로를 해결해줄 수 있을까? 결국 현실에서 본인의 태도를 바꾸는 것만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일테고, 구보 역시 마지막엔 이제 생활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즉 할일없이 종로 근처를 하루종일 배회하는 구보가 아닌, 정말 진득하니 마음먹고 소설을 써볼 생각을 한다. 그런 태도의 변화가 결국 끊임없이 현실을 한탄하며 신세를 비관하는 내 또래 직장인들에게 필요한 메세지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새벽 2시까지 요정에서 친구와 술을 거나하게 한뒤 거리로 나온다. 그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피로를 발견한다.
생활을 가진 자(직업과 직장을 가진 자)들은 순간의 고뇌와 피로를 잊기 위해 술과 사람들과 교류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다시 피로로 돌아오고 집(무덤)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게 되리라. 기계적인 생활을 피할 수 없는 생활을 가진 자들. 현대인의 도시생활이 그러하다. 직장에서 사투를 하고 집에 들어가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또 내일을 준비하고, 그렇게 1년, 10년이 흘러간다. 그렇게 자기를 잊어가기도 하고, 또 목표나 비전, 성취를 잊어가기도 한다. 그냥 그렇게 시간의 흐름에 나를 내던지는 것이다. 그게 바로 생활자의 고독가 공허함의 원인이리라.

결국 소설가 구보씨는 나에게 끊임없이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또 무덤에 갇힌 생활자가 되지말라고 외쳤다. 일과 돈에 휘둘리는 내가 되지 말고 주체적으로 내 인생을 주무르는 사람이 되며, 또 그의 말대로 남들의 잣대가 아닌 나의 주관으로써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에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성인이 되라고 말했다.

구보와 박태원이 전해주는 메세지 못지 않게
두산아트센터 무대와 극의 짜임새도 만족스러웠다.

공연 중간중간 당시 신문기사 또는 인물에 대한 소개를 스크린에 띄어줬는데, 이는 극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고 또 가상 인물인 소설과 구보씨와 실존 인물 소설가 박태원을 오버랩하며 극을 이끄는 기법도 꾀나 신선헀다.
때론 공상과 상상이 현실의 난제를 극복하는 힌트를 갖다주기도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체험했고, 또 소설가를 꿈꿨던 어린 시절의 감성으로 돌아가 박태원, 이상, 김기림을 만나고 또 그토록 좋아했던 기형도도 떠올려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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